중국인, 3천년 전 원시나침반을 사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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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3천년 전 원시나침반을 사용하다
  • 정거배
  • 승인 2016.05.2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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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62>
▲ 황제시대 방향을 분별할 수 있는 지남차는 신화로만 전해지는 것이어서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석의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 낸 나침반은 3천년 전인 중국 주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 한비 등이 쓴 책 한비자에는 ‘선왕이 사남으로 단조석’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선왕은 주나라 왕을 뜻하며 사남은 나침반, 단조석은 사방의 방위를 뜻한다. 이처럼 중국은 이미 3천년 전부터 원시적인 것이지만 나침반을 사용했다. 또 다른 문헌에도 춘추시대 정(鄭)나라 사람들은 먼 곳에 옥을 캐러 가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숟가락처럼 된 사남이라는 자석을 휴대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염황의 후손이라고 한다. 염황의 후손이란 표현은 오늘날 중화민족이란 말로 구체화됐다. 염황이란 중국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라는 인물을 말한다. 여기서 황제는 황제(皇帝)와 구분된다. 신화 속의 황제는 매우 지혜롭고 능력 있는 인물로 나온다. 중국인들의 선조인 황제는 천문, 역법, 수레, 배를 비롯해 나침반의 원조격인 지남차까지 발명해 냈다. 뿐 아니다 의술과 양잠, 문자, 음악, 도량형 제도 등 모든 문명 제도가 황제로부터 기원했다고 믿고 있다.

황제의 뒤를 이어 요·순임금이 나온다. 이어 하나라와 은나라(상나라), 주나라 시대가 이어진다. 중국의 고대국가 당시에는 왕위가 세습제가 아닌 선양제였다. 선양제는 직계후손이 아닌 일련의 절차에 따라 왕을 선택했다. 주나라 시대는 당시 서양에는 없는 분봉제, 그리고 분봉왕에게 제후국을 떼어 주고 중앙의 왕이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가 주나라 말기에 제후국들이 주나라 왕조에 반기를 든다. 이로써 주나라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 이를 세분하면 춘추시대(BC 770~BC403)와 전국시대(BC430~BC221)이며, 진나라가 군웅할거의 시대를 끝내고 천하를 통일한 때가 BC221년이다.

그래서 중국 역사를 말하길 진나라가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을 성립한 이전의 시기를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해 전제주의적 중앙집권방식으로 나라를 통치한 최초의 황제(皇帝)이다. 그러나 첫 통일국가 진나라는 15년을 못넘기고 멸망하게 된다. 진의 멸망 원인에 대해 훗날 폭압통치와 벼랑 끝에 몰린 백성들의 고단한 삶 등등 많은 분석이 있어왔다.
이후 들어선 한나라는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국가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지금 한자라고 하는 말도 한나라의 글자라는 뜻이다.

한나라는 400년 간 지속된 왕조다. 한무제 시대는 부국강병의 시대가 있었을 정도로 중국 역사상 강성했던 왕조 중의 하나다. 그러나 왕조의 멸망은 궁궐 내부의 부패와 균열이었다. 한나라 말기 외척과 환관들의 득세했고 황건적의 난 등 백성들의 봉기가 일어나 한나라는 멸망했다. 그 뒤 소설로도 유명한 삼국시대를 거쳐 5호 16국 시대로 이어진다. 여기서 위진남북조 시대는 서기 221년부터 589년까지 369년 간 지속된다. 이 혼란한 시대를 마감한 왕조가 바로 수나라다. 수나라 문제는 진(陳)나를 멸망시키고 통일한다. 수나라를 나중에 고구려를 침입한다.  하지만 수나라는 40여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서기 618년 당 왕조가 들어선다.

나침반, 중국 신화에 나오다

나침반에 대한 언급은 중국인들이 선조로 모시는 황제(黃帝)시대에 나온다. 그런데 실제로 황제묘가 있다. 중국 산시성 황릉현이란 지역이 있다. 황릉현 북쪽에서는 교산(橋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 정상에 거대한 능묘가 있다. 바로 중국인들의 조상 황제의 묘지이다. 한나라 시대 역사가인 사마천(BC145~BC86?)도 “황제가 교산에 묻혔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따라서 황제릉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 황제는 황하와 장강 유역 일대에 부족의 수장이었는데, 난폭한 부족장 치우라는 인물과 전쟁을 하게 된다. 전투 도중에 치우가 요술을 부려 안개를 자욱하게 만들어 황제의 병사들이 방향을 잃게 했다.

길을 잃은 황제의 병사들을 수레 위에 설치한 인형의 팔이 항상 남쪽을 향하도록 만들어진 지남차를 이용해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치우군대를 지금의 산동성까지 추격한 끝에 사로잡아 치우의 목을 쳤다고 전해진다. 치우를 제압한 황제는 또 다른 부족장 염제세력을 제압하고 각 부족장의 추대를 받아 수장이 됐다. 이렇게 해서 황제 부족과 염제부족이 합쳐져 화하족이 됐다. 화하족을 바로 중화민족의 조상이자, 중국인들이 말하는 염황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같은 신화 속의 내용이지만 중국인의 정체성은 여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3천년 전부터 원시 나침반 사용

유럽인들도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배를 타고 항해한다는 뜻은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를 오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배를 짓는 기술 때문이기보다는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원양항해가 불가능했다. 인류가 나침반을 발명한 것은 선박에 눈을 달아준 것이자, 서구 국가들이 식민지 약탈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황제시대 방향을 분별할 수 있는 지남차는 신화로만 전해지는 것이어서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석의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 낸 나침반은 3천년 전인 중국 주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 한비 등이 쓴 책 한비자에는 ‘선왕이 사남으로 단조석’이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선왕은 주나라 왕을 뜻하며 사남은 나침반, 단조석은 사방의 방위를 뜻한다. 이처럼 중국은 이미 3천년 전부터 원시적인 것이지만 나침반을 사용했다. 또 다른 문헌에도 춘추시대 정(鄭)나라 사람들은 먼 곳에 옥을 캐러 가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숟가락처럼 된 사남이라는 자석을 휴대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우리에게 알려진 관포지교의 주인공인 관중도 자신의 저서에서 “자석 아래에는 반드시 동금이 있다”고 써 놓고 있다. 자석이라는 원래부터 물체를 끌어당기는 자성과 남극과 북극을 향하려고 하는 극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 극성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국은 전국시대에 최초로 극성을 발견했는데, 남쪽을 가리키는 특성을 이용 초기의 나침반 ‘사남’을 제작했다. 숟가락 모양의 도구에 사남의 성질을 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평평한 바닥을 이용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이것이 지남어이다. 물고기 모양의 강철조각을 불에 달군 뒤 머리는 남쪽, 꼬리는 북쪽을 향해 놓고 꼬리를 물속에 넣어 급냉각시키면 자성을 갖게 되고, 이 물고기 모양의 초침을 물그릇에 넣으며 뜨면서 머리가 남쪽을 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자성이 강하지 않아 기대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 또한 이런 도구의 용도 역시 항해용이라기보다는 풍수지리나 미래를 점치는 데 사용되었다. 묘지나 집터를 잡을 때 사용되는 등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북송시대 나침반 기술 향상

이어 시대가 흘러 북송의 유명한 심괄(沈括, 1031~1095)이 지남침의 바늘이 남쪽을 가리키도록 고안해 냈다. 그의 저서 몽계필담에서 지남침의 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지남침의 바늘을 물을 담은 그릇 속에 넣어두고 떠오르게 해서 남쪽을 가리키도록 했다. 또 지남침을 손톱 위에 올린 뒤 가볍게 돌리고 나서 남쪽을 향하도록 하는 방법도 고안해 냈다. 또 하나는 자성을 띤 바늘을 매끄러운 그릇에 넣어 굴리면서 바늘이 남쪽을 향하게 했다. 이밖에 자성을 띤 바늘 중간에 촛농을 한 방울 떨어뜨린 뒤 가느다란 실이 촛농에 달라붙도록 해서 공중에서 몇 차례 돌다가 방향을 가리키도록 했다.  항해 중에 사용하는 나침반은 심괄이 900년 전 만들어 낸 원리대로 제작됐다. 특히 심괄은 세계 최초로 편각을 발견했는데, 편각이란 지리상의 남극, 북극 방향과 자기극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편차를 말한다. 지남침의 지침이 가리키는 남극과 북극은 자오선을 따라 북자극과 남자극을 가키게 되는데, 이런 자오선과 지리학적 자오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협각이 생기게 된다.

심괄은 그의 저서 몽계필담에서 ‘자석을 갈아 바늘을 만들면 남쪽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동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에 정남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그 뒤 400년이 지난 1492년 콜럼버스 대서양을 건너면서 편각을 발견하게 된다.  어찌됐던 중국에서 발명된 나침반 제작기술이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원거리 항해술은 획기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아랍세계가 중국으로부터 나침반을 전파받아 다시 이를 유럽에 전파했다는 설이 정론이다. 아랍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나침반은 유럽에서 발전을 거듭한 끝에 오늘날과 유사한 형태의 나침반으로 발전했다.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을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은 원거리 항해에 나서면서 식민지 약탈이 시작됐다.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는 “나침반은 세계의 시장화 시대를 열었으며 식민지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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